본문 바로가기

인천둘레길(마침)

17.07 인천둘레길1코스(계양산)


(징맹이고개터널과 터널위 생태통로)











인천둘레길1코스

계양산(연무정~징맹이고개)












  (클릭 커짐)

 인천둘레길은 S라인녹지축(가현산~청량산)과

 옛 자취(중구, 동구일대 원도심) 를 걷는 길로 구성되었다







  탐방경로 : 주황색선 포함,  제일 넓은(긴)코스 / 징맹이고개를 시.종점으로 역시계방향



 ♠ 탐방일시 : 2017. 7. 21(금). 흐림 / 3시간34분9점심시간 등 제시간 포함)

 ♠ 탐방경로 : 징맹이고개→장미원→연무정→무당골→고랑재고개→목상동이주단지→피고개산→피고개→징맹이고개 / 10.8km


 






 오늘은 인천둘레길 1코스를 걷는 날이다.

 1코스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개의

 코스가 있는데 정상은 여러번 올랐기에 긴 코스를 택했다.


 규정된 코스대로 걷는다는 게 목상동솔밭은 못 들렀다.

 더 크게 돌았기 때문이다. 목상동솔밭은 1주일 전

 계양산탐방때 들러간 적이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차창 밖으로 멀리 계양산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11:44  계산동자연풀장정류장

 규정대로라면 연무정(야외음악당)에서 출발,

 원대복귀하는 코스지만 2코스까지 탐방코자 중첩구간을


 없애기 위해 징맹이고개를 들/날머리로 잡았다.

 여기서 하차, 진행 역방향으로 걸어간다








 우측으로 계양산정상과 피고개로

 향하는 능선(좌측)이 펼쳐저 있다








 징맹이고개터널 안에는 벽화가 그려저 있고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인도가 설치되어 있다








 11:54  징맹이고개

 오늘 탐방하게 될 1코스와 2코스의 출발점이다.

 1코스는 징맹이고개~연무정~징맹이고개로 원복코스다.


 고개터널은 땅을 굴착(관통)하지 않고 터널시설물을 만든

 후에 흙을 덮어 생태통로를 조성했다고 한다


‘경명현(景明峴)’ 혹은 ‘경맹이고개’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계산동과 서구 공촌동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고대 남지방에서 중국 대륙으로 통하던유명한 고개이다. 원래는 수주고개라 부르던 것이경명현으로 명칭이 변하게 되었다. 징맹이고개라는 지명은 매를 징발한다고 해서 징매(徵鷹)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변한 것으로 고려 충렬왕 때의매방과 관련이 깊다. 충렬왕은 매를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매방(鷹坊)을 두고 매를 잡아 훈련을 시키고 그 매를 원나라에 바쳤다.이 고개는 잡초가 무성하고 솔밭이 우거진 험준한 사냥터였다.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기 때문인지 이 고개는 도둑이 득실거려 임꺽정(林巨正)도 한 때 이 계양산(桂陽山) 징맹이고개[景明峴]에자신들의 소굴로 두었다. 징맹이고개 산적들은 매우 사나워 지나가는 행인들의 금품을 빼앗는 것은물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이 고개를 안전하게 넘어가려면 천명은 모아야 한다 해서천명이고개라고도 하였다.










 생태통로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징매이고개터널 위의 생태통로로 계양산과

 중구봉, 천마산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경명대로 인천서구방향








 그 옛날 이곳 계양산에는 계양산성과 중심성이 있었다.

 계양산성은 복원 중에 있지만 중심성은 그 터만 있다고 한다


중심성은 구한말 열강의 침입으로부터 한양을 지킬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구한말 부평부사 박희방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양열강의 외침이잦아지자 서울로 가는 길목인 부평을 반드시 잘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인천이 강제 개항된 1883년 조정에서 새로운 성을 쌓으라는 명령을 내려오자 아전과 고을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성을 쌓을 자금을 마련하고 직접 돌을 나르며 힘을 모아 징맹이고개(景明峴)를 중심으로 동서 능선을 따라 산성을 쌓았다. 성이 완성되자 박희방은 백성의 마음을 모아서 완성된 성이라 하여 무리 중(衆)에 마음 심(心)을 써 중심성이라 이름 지었다. 성문은 고개 이름을 따서 경명문이라 하고 문루는 공해루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문루에 부평8경을 걸어두었다.








(클릭 커짐)









 이정목 아래 퇴색된 둘레길방향표시를 따라 숲속으로...
















 우측 방향표시판의 안내를 따라 목교를 건너니









 12:06  장미원

 지선사와 지근거리에 있는 장미원이다.

 장미꽃과 계양산, 분수대를 볼 수 있고







(클릭 커짐)

가까운 곳에 이규보선생의 시비가 있다


고려 무신정권 때 문장가로 유명한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어렸을 때 이름은 ‘인저(仁低)’이다.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재가 뛰어나 기재(奇才)라고 불렸지만 정작 사마시(司馬試)에는 연속 낙방하였다. 이는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시의 글을 평소 멸시했던 그의 태도가 하나의 요인이었다. 어느날 꿈에 규성(奎星-문운을 관장하는 별)이라는 노인이 나타나 과거에 합격할 것을 알려주었다. 이에 잠에서 깨어난 인저는 이름을 ‘규성이 알려 주다’는 뜻에서 ‘규보(奎報)라 바꾸었는데, 그 직후 네 번째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하지만 관직을 받지 못하고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지내기도 하였다. 30세까지 관직이 없는 자신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 관리로라도 취관시켜줄 것을 진정하기도 하였는데 그 갈망의 연장선상에서 무신정권의 지도자인 최충헌(崔忠獻)의 초청 시회(詩會)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바쳐 급기야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취관 이후에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벼슬을 얻은 후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보고 들은 것을 글로 남겼다. 1219년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부사병마검할(副使兵馬黔轄)로 부임했을 때도 많은 글을 남겼다. 박봉인데다 주변 환경은 열악하고, 백성의 생활 모습은 참혹해 일각이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어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글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나타난다. 몽골 침략기 때에는 민족의 대 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지음으로써 민족의식을 크게 선양했고, 부처의 힘으로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고자 대장경을 조판할때 서문에 해당하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지었다.『 동명왕편(東明王篇)』,『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계양도호부 부사 재임 시절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기어 훗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부평읍지(富平邑誌)』를 짓는 자료의 토대가 되었다. 시와 술, 거문고를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도 불리웠다. 묘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으며,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넓은 길이 있는 계양산산림욕장








 게양문화회관쪽으로 가기 위해 우틀하여 계단으로 내려가고
















 버섯색갈이 무척이나 곱다








 노틀담수녀회 입구








 12:22  계양문화회관
















 12:28  경인여대 정문

 정문 앞에서 20분간에 걸쳐 돈까스로 점심을 해결했다








 12;56  연무정

 연무정입구 좌측에는 계양산성박물관

 건립공사 중이라 칸막이시설을 해놨다








 연무정(야외음악당)









 (클릭 커짐)

















오늘날의 부평 지역은 고구려시대 주부토군(主夫吐郡)으로 불렸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장제군(長堤郡)으로 고쳐졌으며,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수주(樹州)라하였다. 이후 의종 4년(1150)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고종 2년(1215)에 계양(桂陽)도호부로 고쳤으며 충렬왕 34년에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충선왕 2년에 전국의 목(牧)이 폐지됨에 따라 낮추어서 부평부(富平府)로 변경되어 6개의 현을 거느렸다.

해발 395m인 계양산은 부평 일대가 수주로 불리던 시설에는 수주악으로, 안남도호부 시절에는 안남산으로 불리다가 고려 고종 때 계양도호부가 되면서 계양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평의 진산으로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중요교통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 서쪽 지방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한강과 그 주변이 한 눈에 들어와 예로부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산이다.계양산의 명칭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이 산에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아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계양산에 이 나무들이 실제로 많았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대로 받아드리기엔 무리가 있다. 두 번째 견해는 언어학적인 견해인데, 좀더 타당성 있어 보인다. 즉, 계양산의‘ 계’는 산 또는 높은 곳을 뜻하는 순우리말‘ 달’에서 변형된 것으로 본다.‘ 달’이 산이나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 옛말이라는 점은‘ 달동네’라는 말이‘ 달이 보이는 동네’가 아니라 ‘높은 곳에 위치한 동네’를 의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우리말 ‘달’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내용이 잘못 전달되어 달 월(月)자나 닭 계(鷄)자 등으로 변형됐다가 좀 더 의미가 좋아 보이는 계수나무 계(桂)자로 다시 바뀐 것이다. ‘양’의 경우도 우리말에 높은 곳을 뜻하는‘ 부리’가‘ 불’을 거쳐‘ 밝’으로 변형되었다가 다시 한자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높은 언덕을‘ 양’이라고 표기한 옛 기록으로 보아서도 그 타당성이 높다. 이렇듯‘ 계양산’은‘ 높은 산’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달부리’가 한자로 옮겨져 기록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레길에서 바라본 계산동방향








 13:01  임학사거리

 목상동솔밭 방향으로...








  저기 삼거리에서 우틀(탐방객 진행방향),

 이정목에 둘레길방향표지판이 있다








 13:06  무당골고개?

 계양산누리길(샛별농장) 쪽으로,

 역시 이정목 아랫쪽에 둘레길표지판이 있다.


 기왕이면 여기가 어디라는 걸 표기했더라면...

 쓰잘데 없는 위도와 경도는 표기하면서








 걷기좋은 숲길, 힐링은 나의 몫...!!!








 탐방로변에 두부집이...

 김치, 전골, 보리밥, 콩국수, 해물버섯전..등등








 탐방로변에 있는 풍천임씨선산








 탐방로 우측의 또 다른 간이식당(검은 차광막).

 잔치국수, 냉면, 영양탕, 파전, 도토리묵 등등








 13;17  샛별농장입구 삼거리

 좌틀하여 진행








 13;19  청수물웅덩이

 습지(웅덩이)를 야생동식물의 서식공간으로 조성한 곳
















 13;27  무당골??

 하느재고개와 목상동솔밭으로 갈라지는 곳.

 나는 목상동솔밭 쪽으로...
















 둘레길 탐방중 몇 안되는 조망이 열리는 곳이다








 고촌방향








 13:46  고랑재고개

 삼거리로 계양산정상까지는 0.96km








 방금 지나온 방향이고








 고랑재고개의 이정목, 목상동솔밭쪽으로 진행








 13;54  청룡정0.5km전방사거리

 여기서 목상동이주단지로 갔다가

 목상동솔밭으로 올라 갈 요량이다








 13:58  헬기장(정상)

 잠시후 둘레길변에 있는 펑퍼지름한 헬기장(정상).

 혹시 여기가 앞메산...??








 조용한 숲길이 이어지고








 둘레길방향표지판과








 둘레길리본








 빼곡한 침엽수

 이쪽 방향의 숲과 인근 목상동솔밭은 가히 일품이다,

 정말 절로 힐링이 되는 그런 곳으로 손색이 없다








 14:16  목상동이주단지

계양산북쪽 깊숙한 숲속의 마을로, 부평 이씨의 시조로 전하는 이희목(李希穆)이 살던 곳이라 하는데 나무소리, 나무서리, 나무수리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향토사학자들은 이곳이 산 속 깊은 곳이다 보니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나무에 서리가 걷힐 틈이 없었기에 나무서리(木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을 수소리(樹蘇里)라 불렀는데, 여기서 부평의 옛 이름인 수주(樹州)가 비롯되었다 한다. 이희목이 왕건에게 스스로 땅을 넘기고 몸을 맡겨 공신이 됨으로써 수소리에 수주의 청사가 있었다









 목상동이주단지에서 목상동솔밭으로 가야하는 데

 이정표도 없고 망설임끝에 우측 포장길로 ... 결론은 알바였다.

 좌측 비포장도로를 따랐으면 반딧불이서식지와 목상동솔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이정목의 설치가 꼭 필요한 곳이다








 주차장 멀리 계양산정상








 14;23  노란대문집

 노란대문이 아닌 철대문...??

 전에는 음식점이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전봇대 좌측으로








 목교와








 작은 도랑을 건너








 숲길로 올랐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지만

 한참후에 합류되는 것 같다








 진행 반대방향에 있는 검암산(우측, 216.7m),

 계양산에서 검암역으로 갈 때 지나갔던 곳이다








 14;50  피고개산정상

 벤치 두개 외에는 정상임을 알리는 그 어떤 표식도 없다








 피고개산에서 바라본 중구봉(좌)과 천마산(우).

 여기서 물도 마시고 잠시 쉬었다 간다








 15:01  피고개

 시천동과 검암동을 넘어드는 고개이다. 조선시대 검암마을의

 해주정씨 형제가 진사시험에 합격하고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삭탈관직을 당하고 넘어 오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15:07  돌탑군








 연꽃밭
















 계양산물웅덩이








 이어지는 둘레길








 허걱... 조심해야지.

 산불이 났던 모양이다(산불피해지)








 15;28  징매이고개

 한바퀴를 크게 돌아 원점인 징매이고개터널

 앞으로 내려와 2코스를 이어간다.

 1코스는 목상동솔밭을 놓친 게 아쉬운 탐방이었다









 ♠ 탐방경로 : 징맹이고개→장미원→연무정→무당골→고랑재고개→목상동이주단지→피고개산→피고개→징맹이고개 / 10.8km

 308번/백석중고교환승90번→계산동자연풀장(11:44)→징맹이고개(11;54)→장미원(12:06)→경인여대정문(12;28)→점심(12;29~49)→연무정(12;56)→무당골고개(13:06)

 →샛별농장(13:17)→무당골(13;27)→고랑재고개(13:46)→청룡정500m지점사거리(13:54)→목상동이주단지(14:16)→피고개산(14;50)→피고개(15:01)→돌탑군(15:07)→

 징매이고개(1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