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돈대)
강화나들길2코스
호국돈대길(갑곶돈대~초지진)
□ 일 시 : 2015. 1. 17(토). 맑음
□ 동반자: 나홀로
□ 경 로 : 갑곶돈대→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보→용두돈대→덕진진→초지진
□ 거리시간 : 17km / 5시간20분(모든 시간.거리 포함)
- 세부경로 및 도착시간 등은 후기 끝부분에 표기
□ 기타
- 완주도장 받는 곳 : 출발시는 갑곶돈대 관광안내소 또는 진해식당 / 도착시는 초지진 관광안내소 또는 초지진매점
- 입장료(성인기준) : 갑곶돈대 900원, 광성보 1,100원, 덕진진 700원, 초지진 700원
- 그늘이 없는 관계로 하절기에는 비추천 구간
동선(북→남, 청색실선)
갑곶돈대는 1코스때 가 봤으니 관광안내소에 들러 2코스 출발도장만 찍고 간다.
도장이랑 스탬프가 밖에 있으니 직접 찍으라 한다
차도, 인도겸 자전거길, 나들길(비포장 뚝방길).
구분이 확실하다
서쪽 멀리 혈구산자락과 그 우측으로 강화산성 남장대가 있는 남산이 보인다
당겨본 남장대와 그 뒤로 고려산
도로한켠에 자리한 인도겸 자전거길을 따라...
김포 월곶면 포내리
문수산, 강화대교
그리고 염하(김포해협)...
나들길 옆으로 넓게 펼쳐진 갯벌
멋으로 세워놓았나 보다..ㅠㅠ
얼음지치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잠시 동심의 세계로 빠져본다.
우리 어렸을 때에도 저러고 놀았지! 노는 건 다 똑 같다.
가장자리에 있는 어른들이 새끼들 노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하는 모습이다
용진진(龍津鎭 향토유적 제8호).
조선 효종 7년(1656)에 쌓았다. 원래 병마만호 1인, 군관 24명, 사병 59명, 돈군 18명
도합 102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진에서는 가리산, 좌강, 용당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출처 : 위키백과)
진(鎭)은 요즘의 대대, 보(堡)는 중대규모에 해당하는데 진과 보는 상하관게가 아니고 그 아래에는
소대에 해당되는 돈대(墩臺)가 소속되어 있었다. 강화도에는 모두 5진, 7보, 53돈대가 있다
용진진
도로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조금을 가니
용당돈대(龍堂墩臺).
조선 숙종5년(1679년)에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돈대로 용진진에 속하는 돈대로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4개의 포좌가 설치되었으며 내부에는 건물터가 남아있다.
돈대란 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부분이며 해안방위시설로 사용되었다
용당돈대
일사분란한 오리들
화도돈대(花島墩臺,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
높은 언덕이 아니라 해안 낮은 절벽이 있는 곳에 위치,
성벽은 거의 파괴되고 축대 일부만 남아있다
화도돈대
자유분방한 오리들
멀리 혈구산 실루엣
신선놀음 중... 사진엔 안 보이지만 옆에는 자가용까지.
장비가 참 좋은 것 같다. 연통까지..ㅎㅎ
저 위에는 오두돈대가 있다
오두돈대(鼇頭墩臺, 사적 제227호).
돈대가 있는 위치의 모양이 자라의 머리모양이라고 해서 오두돈대라 하는데
전형적인 돈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많아서 관측은 커녕 주변도 잘 안보인다
강화전성(앞면, 뒷면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전성이란 돌로 쌓은 기초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강화외성의 일부다
갯벌에 설치된 작품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자연의 보고, 갯벌이 무진장...
강기운의교비.
강화 덕성리 출신으로 일제시대에 사재를 털어 광성보입구에 수문을설치,
주민들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을입구에 비를 세웠다
광성보 (무료)주차장.
입장료가 있다(성인 1.100원)
광성보는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고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가 되거나 순국 하였다.
당시 전사한 무용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여 전시되고 있다.
광성보(사적 제227호)의 성문인 안해루
광성돈대(廣城墩臺)
송림을 지나면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와 쌍충비가 자리한다
신미양요(1871년)때 미해군과 항쟁을 하던 조선군은 무기의 열세로 대부분이 전사를 한다. 특히 어재연 장군의 싸움을 지켜보던 민간인 신분의 동생 어재순은 형을 도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한 충절을 기려서 세운 쌍충비각이 있다
신미순총.
신미양요 때 항전하다 전사하신 분들의 시신을 일일이 수습하지 못하고
한 곳에 묻었는데 이들의 묘역을 그대로 보존을 하고 있다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축조되었고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때
미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곳이라 한다
손돌목돈대
용두돈대(龍頭墩臺).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요새로 손돌목돈대에 속해있는 외곽초소겸 포대이다
용두돈대에서 한바퀴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염하
용두돈대의 포대
용두돈대 옆에 위치한 광성포대(중앙)
안쪽에서 본 광성포대 모습
이제 멀리 초지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의 성문인 공조루(控潮樓)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병인양요(1866년)때
양헌수장군의 부대가 밤을 틈타 이 진을 통해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군대를 격퇴하였고
신미양요(1871년)에는 미국함대를 격퇴시켰다
남장포대(南障砲臺).
포대그림은 어디에선가 봤던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 교과서던가...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때 덕진돈대와 함께 미 함대를 맞아 맹렬한 포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덕진돈대
덕진돈대
덕진진 경고비(警告碑)의 앞면과 뒷면.
대원군의 명으로 만든 이 비의 비문을 해석하면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척화의 결연한 의지가...
그런데 과연 외국선박이 이를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명항
군함의 문양이 태극기라 이채롭다
초지진해변의 횟집들
초지진에서 바라 본 등대와 초지교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1871년 미 함대의 침공으로 모든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이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하여 파견한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초지진은 단순히 역사의 흔적을 돌아보기 위한 관광지 개념이 아닌
우리민족의 아픈 시련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북악산에 가니 총맞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여기에 오니 포맞은 소나무가 있구나..!!
오늘 2코스를 다 돌고 나니 또 일몰을 맞는다.
2코스는 이정표가 아주 잘되어 있어 길 찾는데 애를 안 먹었다.
관광안내소에서 완주도장을 받고 나가 버스(60-3번)를 기다리는데 모르는 자가용이
앞에 와서 선다. 추운데 서있는 심정을 알아서 태워드린다고..
초지진 인근에 있는 알뜰주유소의 사장님이라신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 트레킹경로 : 갑곶돈대→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보→용두돈대→덕진진→초지진
가출(10:47)→갑곶돈대관광안내소(11;54트레킹시작)→용진진(12:59)→용당돈대(13:16)→화도돈대913:45)→오두돈대914:01)→광성보(14:46)→용두돈대(15:15)→덕진진(16;10)→초지진(17:00)→트레킹종료(17;14)→귀가(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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